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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소설

유령 퇴장 _ 필립 로스 _ 문학동네 _ 초판1쇄




에브리맨으로 시작해서 몇권의 소설을 접했다. 

정확하게 저자의 연혁을 찾아보지도 않았고 언제 어떤 책을 집필하고 출간하였는지도 모르지만, 불의나 분노에 휘청휘청하는 나의 어린 모습을 한숨 가라앉히고 들여다보게 하는 어떤것이 그 안에서 흔들어 부른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어떤 사건으로 인해 도망치듯 세상에서 한발 물러나 육체적 쇄약과 더불어 여러가지 욕망을 정리했던 노작가가 사소한 계기하나로 물결을 즐기다 자신도 모르는 채 해일에 휩싸이는 이야기라고 할수 있겠다.


읽었던 몇 권의 소설에서 그랬듯이 이 책에서의 배경역시 미국이라는 국가의 어떤 순간 그자체를 담고 있기에 정치-사회적,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혹은 종속적으로 연속되어있는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저 등장인물이 사는 배경국가에 그치지않고 작금의 사회에 비추어 나의 위치나 태도를 곱씹어보게한다. 특히 이번 책은 과거라고 부르기엔 현재진행형인 아주 가까운 시점를 다루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한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조금 고달펐던 것은 문장의 길이와 목적어의 남발이었다. 짧디 짧디 짧은 문장들이 쏟아지다가 순식간에 한페이지인지 한문단인지 구분이 안될정도로 집어삼키는 한줄짜리 문장이 이어지는 것은 아마도 작가의 의도임에 틀림없겠지만 익숙해지기까지 조금 시간이 필요해서 몇번을 다시 읽고도 확실히 뜻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반절을 제법 넘어서야 익숙해질수있었는데 책을 한번에 읽어내리지 못한 탓인지 노쇄한 주인공의 어법에 그제야 적응했는지 모르겠다.아마 집중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말이다. 


작중 노작가는 젊은 작가들이 정치에 분개함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되집어 그 긴 세월동안 그다지 변한것이 없음을 기억하지만, 자의적, 타의적으로 도망하여 침찬시켰다고 생각했던 욕망들이 가벼운 희망한번에 들썩여 원색적인 모습으로 왕성하게 터져나오는 모습을 보이며 그또한 다르지 않음에 고통스러워한다. 어쨌든 완벽한 인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임에도 착실하게 쌓아올린 한 인간을 휘청이는 것이 뒤꿈치를 찌르는 파석하나이며, 자신의 충족을 위하여 누군가 그돌을 찾아 신발속에 숨겨놓는 일이 왕왕있다는 것이 놀랍다.더군다나 내적 완성과 작은 이성을 추구하던 자는 그 휘청거림 한번에 부서져 가루가되고, 혹자는 폭력으로 풀고 결과로 합리화하여 자신의 욕망 달성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어 또 슬프다.


젊음과 노년이라는 것, 사회와 정치, 애정과 성욕에 대한 솔직함, 희망의 허망함과 포기해야하는 것들 그리고 관조와 도망이 고작 400페이지도 안되는 책한권에 빡빡하게 들어차있는 것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중반에는 문장에 휘둘려 혼란스러웠지만 종반에 들어서자 책장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누군가 집중을 깨뜨리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변화, 사회에 대한 것은 아무리 조급하게 보지 않으려고 애써도 달성과 성취까지의 길이 요원해보인다. 한 개인속의 의도도 내적충돌로 폭발할 지경인데 다수의 욕망이 마주하는 사회라는 아수라장은 어련할까. 그럼에도 변화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속에서 신음소리 한번 내지 못한채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부정하고 싶겠지만 자신도 그에 속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할 수 있는, 혹은 해야하는 것은 기대를 쥐고 돋우지 않은채 그저 기록하고 기억하며 다만 뒷걸음치지 않는것일 수 있겠다. 다만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p.58 "아니, 웃지 말고. 진지하게 4000년을 생각해보게. 한번 상상해보게. 그것의 모든 차원에 대해, 모든 측면에 대해. 4000년. 천천히 생각해보게." 엄숙한 침묵이 일 분쯤 흐르고 난 뒤 나는 두사람에게 조용히 말했다. "일흔이 된다는 게 바로 그런 거라네."


p.95 9.11 테러 이후로 나는 세상의 온갖 모순에 대해 관심을 꺼버렸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넌 편집자에게 편지질이나 하는 미치광이나 동네 불평꾼이 되었을 거야. 신문을 읽으면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밤에는 이 친구 저 친구에게 분노의 고함을 질러댔겠지. 미국의 아이들이 듣고 자라는 저 온갖 자유의 구호가 울려퍼지는 이 자유주의 국가의 왕이, 공화국인 이 나라의 왕이, 천치 국왕이 악독하게 이득을 취하려고 상처받은 국민의 참 애국심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이지. 조지 W. 부시 정권하에서 성실한 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 덕목이었던 용서 없는 멸시는 합리적으로 평온하게 살아 남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키워온 사람이 취할 자세는 아니었다.


p.362 "와주게, 제이미. 난 자네가 내가 배우기엔 너무 늦어버린 뭔가를 가르쳐줄 수 있을 거란 느낌이 드네." "그건 환상이에요. 전부 다요. 안 돼요, 전 갈 수 없어요, 주커먼 선생님." 그런 다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였는지, 그저 가책을 면하기 위해서였는지, 혹은 그녀도 마음 한구석에 그런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덧붙였다. "다른 기회에." 마치 내가 그녀가 그럴 때까지 서성이며 기다릴 수 잇는 시간을 창창하게 갖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나는 한때 나 자신의 힘을 유지해줬던, 나의 힘을 시험했던, 내 열의와 열정과 저항력을 불러일으켰던, 크건 작건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들 필요를 불러일으켰던 힘들로부터 도망쳤다. 나는 예전처럼 버티면서 싸우지 않고, 로노프의 원고로부터,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킬 모든 감정으로부터 도망쳤다.


유령 퇴장
국내도서
저자 : 필립 로스(Philip Roth) / 박범수역
출판 : 문학동네 201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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