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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소설

희랍어 시간 _ 한 강 _ 문학동네 1판3쇄




p 8.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짜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 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p 14.  ...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 ㅜ - 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p 23. 눈물이 흘렀던 길에 지도를 그려뒀더라면.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바늘 자국을, 핏자국이라도 새겨뒀더라면.

 

p 95. ...그 꼭대기에 설치된 거대한 전광판들이 보인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그 화면들을 올려다본다. 실제보다 수십 배 확대된 얼굴들이 거대한 입술을 움직여 들리지 않는 말을 한다. 거대한 활자들이 물고기처럼 입을 달싹이며 화면 아래를 흐른다.

 

후반부는 감정과 감정과 감정을 표현한 추상적이고 파편적인 표현들이 낭자하여 쉽게 멈추거나 분량을 남겨두기 어려웠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 남은 절반분을 한번에 읽어버리기 때문이었기도 하겠지만 좋지 않은 컨디션임에도 남은 절반분을 한번에 읽을 수 있도록 이끌었던 것도 이 책의 힘이리라 한다.



희랍어 시간
국내도서
저자 : 한강
출판 : 문학동네 201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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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분출에 휩쓸리지 않고 천천히 읽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을때 후반부를 다시한번 읽어볼 요량이며, 보르헤스에 대하여 조금 흥미가 생겼으니 시간을 내어 살짝 검색해 볼까한다. 위키는 조금 빈약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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